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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독도, 안용복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by 시뮬라크 2024. 4. 2.

목차

    조선 숙종 시대의 울릉도 분쟁과 안용복의 공헌을 통한 독도의 역사를 확인하고, 해방 후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시작 된 현 상태에 대한 원인을 기억하고자 정리하였습니다.

    안용복의 출신과 울릉도로의 여정

    안용복은 숙종 시대의 조선인 어부로, 노비 출신이었습니다.[각주:1]

    안용복 동상 (부산)

    안용복은 부산 동래에서 태어났고, 어부로 살았습니다. 당시에는 어부들이 배를 타고 울릉도까지 가서 어업 활동을 하곤 했습니다.

    이 당시 조선 정부는 공도 정책이라고 해서 섬에 사는 사람들을 육지로 옮기라고 명령했습니다. 이 정책은 태종 때 이방원이 시작했는데, 왜구가 섬을 침략하거나, 역적이 섬에 숨으면 잡기 힘들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울릉도에는 원칙적으로 사람이 살지 않았기때문에, 일본인들이 조용히 울릉도에 들어와서 어업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안용복은 어느 날 일행들과 함께 울릉도로 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그러나, 울릉도에 도착하자마자 일본인들을 발견했습니다.

    안용복과 일본인들의 충돌과 분쟁의 시작

    안용복과 일행들은 일본인들을 보고 울릉도에서 나가라고 했습니다.

    안용복 : 울릉도는 조선땅인데 왜 여기와서 어업활동 하냐
    일본인 : 너네 공도정책으로 버린땅에 들어가서 고기 잡는게 뭐가 문제야
    안용복 : 무슨 헛소리냐, 울릉도는 우리땅이다 우리 조선과 전쟁하겠단 뜻이냐!

    결국 안용복 일행은 다툼끝에 숫자에 밀려 일본으로 잡혀갔습니다.(일본측 공문서와 숙종실록에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이 사건은 일본의 시마네현 태수에게 보고되었고, 태수는 중앙 정부에 알렸습니다. 일본은 임진왜란에서 패배한 후라 조선을 경시하지 않았습니다. "노비도 저런 기백이 있는데, 조선 조정은 얼마나 강할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울릉도가 조선의 땅이라고 인정하고, 일본 어민의 어업 활동을 중단하라는 공식 문서를 작성해서 안용복을 통해 조선에 전달하려고 했습니다.

    안용복은 부산으로 가기위해 대마도를 거치게 되었는데, 대마도주는 일본의 중앙 정부 문서를 빼앗아서 찢어버렸습니다. 대마도는 노략질을 하던 왜구들의 거점이었고, 울릉도의 어업 활동이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대마도주는 가짜공문편지를 숙종에게 보내서, 지금 조선인 어부를 잡고 있다고 말하고, 울릉도가 일본의 땅이라고 인정해야 풀어 줄 것이라고 요구했습니다.

    <안용복이 일본에 다녀온 경로&nbsp; ⓒ 동북아역사재단 >

    숙종의 장난과 울릉도 분쟁의 해

    당시 숙종은 장희빈의 문제로 머리가 아팠습니다. 그래서 대마도 주의 편지에 대해서는 대충 넘어가려고 했습니다. 숙종은 외교 문서에 장난을 쳐서, "죽도는 일본의 땅이다고, 일본의 땅이고, 일본의 땅인데,…(끝에 작게) 그런데 죽도는 어딘지 모르겠고, 울릉도는 우리의 땅이야"라고 썼습니다. 죽도는 일본이 울릉도를 부르던 이름이었습니다.

    이 문서를 받은 대마도 주는 끝까지 읽지 않고, 죽도가 일본의 땅이라고 써져 있으니 기뻐했습니다. 그래서 안용복을 풀어주었습니다.

    장희빈 문제가 끝나고, 당시 영의정이었던 남구만이 숙종에게 "그때는 복잡했지만, 그래도 외교 문서에 장난을 치는 건 너무했습니다. 정식 문서를 쓰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숙종은 "그때는 장난이고, 울릉도를 죽도로 부른 건 너네 문제고, 울릉도는 우리의 땅이야"라고 일본의 중앙 정부에 보냈습니다.

    <영의정 남구만>

    일본중앙정부는 대마도주가 한 짓에 나서 대마도 주를 징계하고, 울릉도가 조선의 땅이라고 인정했습니다. 이렇게 울릉도 분쟁은 해결되었습니다.

    안용복의 두 번째 일본 방문과 울릉도·독도 영유권 확보

    안용복은 1696년 (숙종 22)에 다시 울릉도로 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일본인들이 독도에도 들어와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안용복은 화가 나서 일본인들에게 독도가 조선의 땅이라고 말하고, 쫓아냈습니다. 그리고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확실히 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는 울릉우산양도감세관이라고 속이고, 호키주 태수와 에도 막부에게 대마도주의 비리를 고발했습니다. 그 결과, 막부는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인정하고, 일본인들의 출어를 금지하는 서계를 줬습니다. 이 서계는 「조선팔도지도」라는 제목으로 1696년에 발행되었고, 울릉도와 독도가 강원도에 속한다고 표시되어 있습니다. 이 서계는 현재 일본의 시마네현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원록구병자년 조선주착안 일권지각서 元祿九丙子年 朝鮮舟着岸 一卷之覺書> &ldquo;죽도(울릉도)와 송도(독도)가 강원도에 속한 조선의 영토&rdquo;로 표기되어 있다. 이 문서는 시마네현 오키섬 무라카미 가문(村上家)에 소장되어 있다. ( ⓒ 외교부 독도 홈페이지)

    안용복의 처벌과 평가

    안용복은 조선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안용복이 무단으로 일본에 갔다고 하여 사형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영의정 남구만이 안용복의 공로를 주장하고, 유배로 감형시켰습니다. 안용복은 유배된 이후의 행방이 알려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안용복은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을 확보한 민간 외교인으로서, 후세에 많은 존경을 받았습니다. 정조는 안용복을 영웅호걸이라고 칭찬했고, 근대에는 애국계몽 운동의 일환으로, 일제강점기에는 강호 수역의 상징적인 인물로 인정받았습니다. 울릉도와 부산에는 안용복을 기리는 비와 동상이 세워졌습니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과 반박

    안용복의 활동으로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 문제는 일단락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러일 전쟁을 계기로 동아시아를 점령하려고 했습니다.

    일본은 러시아 함대를 막기 위해 울릉도나 독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여러번 영역 밖의 무인도를 편입한 경험으로 독도를 편입할 기회를 노렸습니다.

    1905년 1월 28일 ‘무인도 소속에 관한 건’으로 독도를 “다케시마로 호칭하고 시마네 현 소속 오키의 도사(島司)가 관할한다.”라고 결정하였습니다.

    이후 일제 강점기에 들어가서, 대한민국은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대해 항의할 수 없었습니다. 해방 후 1952년에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는데, 대한민국은 참가하지 못했습니다. 이때 미국과 일본은 공산주의를 방어하는 동맹이었습니다. 강화조약에서는 한반도,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를 일본이 포기한다고 했는데, 독도는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Japanese Prime Minister&nbsp; Shigeru Yoshida &nbsp;(1878&ndash;1967, in office 1946&ndash;47 and 48&ndash;54) and members of the Japanese envoy sign the&nbsp; Treaty of San Francisco .&nbsp; ⓒ wikipedia

    대한민국 정부는 독도가 빠진 것에 항의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친일 정치인 윌리엄 씨볼드가 일본의 로비에 의해 독도를 일본의 영토로 인정했습니다. 이후로 일본은 독도가 자기 땅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윌리엄 조지프 시볼드(William Joseph Sebald, 1901년 11월 5일 ~ 1980년 8월 10일)&nbsp; ⓒ wikipedia

    독도는 우리 땅!

    본문에서 언급한 내용보다 훨씬 이전부터의 역사와 근거 자료들이 있지만, 중요한 사건 몇가지를 기억하고자 독도의 역사를 정리했습니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은 역사적으로도 법적으로도 근거가 없습니다. 우리는 안용복의 활동과 막부의 서계, 조선팔도지도 등을 통해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였음을 입증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일본은 1905년에 독도를 점령하기 전에도 독도를 조선의 영토로 인정했던 사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1877년에 일본의 내무성이 독도를 조선의 영토라고 선언했고, 1882년에 일본의 외무성이 독도를 조선의 영토라고 인정했습니다. 따라서,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은 역사적 진실과 국제법에 반하는 것이며, 우리는 독도를 수호하기 위해 안용복의 정신을 기리고, 국제사회에 우리의 입장을 알리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1. 조선시대에는 모든 남자들이 호패라는 목걸이를 달고 다녔는데, 안용복의 호패가 현재 전해집니다. 그 안에는 발급 기관과 연도, 이름 및 신체 특징이 적혀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아주 작은 키(4척1촌)에 가무잡잡한 피부, 그리고 마마 자국으로 얼굴이 심하게 얽은 외모라고 쓰여 있으며 주인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것으로보아 노비였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