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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사우디아라비아의 건국과 친미 관계

by 시뮬라크 2024. 4. 2.

목차

    사우디아라비아의 건국

    현재의 사우디아라비아(사우디아리비아 왕국)는 1932년 이븐 사우드가 건국하였다.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서방에는 이븐 사우드(Ibn Saud)로 알려짐 ⓒ wikipedia

    이븐 사우드 국왕이 1902년부터 원정을 펼쳐 22개 부족을 하나로 뭉쳐 왕국을 선포하며, 현재의 사우디아라비아를 건국한다. 정식 국명은 "사우디아라비아왕국"이며 이는 "사우드가(家)의 아랍 왕국"이라는 뜻.

    이슬람교의 85%를 차지하는 수니파의 대표 국가이며, 친미 성향이 강한 국가로 알려져 있다.

    중동 수니파 세력 분포도 ⓒ BBC

    왕위 계승 체계가 조금 다른데, 자신의 장자를 다음 왕으로 정하고, 이후 그 형제가 순서대로 왕위를 계승하도록 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빈 살만"은 왕세자로, 이븐 사우드의 25번째 아들인 현국왕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의 아들이다. "빈 살만"의 "빈"은 누구의 아들 이란 뜻으로 정식 이름은 "무함마드 빈 살만 알사우드"이다.[각주:1]

    유전 개발

    사우디아라비아의 유전은 중동의 이웃나라보다 늦은 1938년에 발견됐다. 페르시아(이란)에선 1908년, 이라크에선 1927년에 원유가 발견된 것에 비해 사우디의 석유 개발은 뒤쳐져 있었다. 그 배경에 사우디 아라비아의 국가형성(1932년)이 늦었다는 점을 들수 있다.[각주:2]

    1922년부터 뉴질랜드인 프랭크 홈즈(Frank Holmes)가 탐사를 시작하였지만, 탐사유효기간 내에 원유 발견에 실패하고, 1932년 소칼(SoCal - Standard Oil of California)이 이어받아 사우디의 석유를 탐사했다. 소칼은 사우디 원유를 채굴하기 위해 CASOC(California Arabian Standard Oil Company)를 설립했는데, 이 회사가 아람코(Aramco)의 시초이다.

    1938년 3월 3일 소칼과 텍사코(1936년 투자 합류)가 시추한 담만(Dammam) 7광구에서 초대형 유전을 발견하였고, 소칼과 텍사코는 영국 BP가 주도하는 레드라인 협정(Red Line Agreement)에 가입하지 않은 덕분에 사우디에서 이권을 확보하게 된다. 영국은 이란과 이라크의 석유를 차지했지만, 미국 석유회사들은 사우디에서 중동석유 이권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이때부터 국방과 경제를 협력하는 미국과의 친밀한 행보가 시작된다.

    1938년 Dammam 7광구 ⓒ wikipedia

    2차 대전 후 미국과의 관계

    하지만, 2차 대전후 세계적으로 민족주의 바람이 불고, 1948년 베네수엘라 정부에서 모든 석유이익에 대해 절반의 몫을 가져가겠다고 주장하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석유기업을 국유화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그해 11월 이익 반분의 원칙이 법으로 제정되었다.

    사우디 국왕도 이 소식을 듣고 아람코에 이익을 반반씩 나누자고 요구하며, 석유산업 국유화 가능성을 꺼내 들었다. 때마침 이스라엘-아랍 전쟁이 터졌고, 사우디는 아랍의 입장을 대변하여, 미국과 영국에 이스라일 지지를 포기할 것을 요구했다.

    미국 국무부는 중동에 소련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우려하면서 동시에 이스라엘 문제를 해결해야 했기 때문에 석유회사들에게 사우디의 요구를 들어주라고 했다. 국무부의 종용에 의해 사우디 정부와 아람코는 이익을 50대50으로 나누는 원칙에 합의했다.

    1950년 사우디에서 체결된 이익반분의 협정은 원유 보유국과 석유메이저 사이에 힘의 관계가 서서히 역전되고 있음을 드러낸 케이스였다.

    1차 오일쇼크

    1967년에 일어난 6일 전쟁(Six-Day War)[각주:3] 이후 아랍인들은 수치를 곱씹으며, 석유를 무기화하기 시작했다.

    이때, 사우디의 국왕은 파이살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로 개혁성향이 강했고, 사우디가 아랍권 군주제 국가들의 중심적 존재로서, 넓게는 이슬람권의 종주국으로서 사우디아라비아의 위상을 확실히 세워가며 명군으로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사우디와 함께 대표적인 수니파 국가인 이집트로부터 사우디가 미국에 너무 호의적이기 때문에 아랍의 결속을 해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었다.

    1971년 8월 15일 미국의 리처드 닉슨 정부는 금본위제도에서 이탈한다고 발표함으로써 주요통화는 플로팅 시스템(변동환률제도)으로 전환되었고, 세계적인 석유수요가 급증해 석유부족 사태가 심화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변화는 OPEC의 주도적 위치를 강화했다.

    미국회사가 100% 참여한 아람코 지분의 일부를 달라고 요구했다. 미국 회사들은 다른 아랍국에서 전면 국유화하는 조치를 목격하고 1972년에 아람코의 지분 25%를 사우디에 내놓고 1983년까지 단계적으로 51%까지 내어주는 협정에 동의했다. 현재는 사우디 정부가 94%의 아람코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파이살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Faisal bin Abdulaziz Al Saud) ⓒ wikipedia

    1973년 10월 6일 이집트와 시리아가 6년전의 치욕을 설욕하기 위해 이스라엘에 보복 전쟁(제 4차 중동 전쟁[각주:4] )을 시작했다. 10월 25일 2차 휴전안이 발표되며 발발 19일만에 종결되었지만, 이스라엘을 지지한 서방에 경제적 피해를 주기 위해 석유수출을 금지하는 바람에 국제유가가 급등하는 오일쇼크가 발생했다.

    10월 16일에는 석유 수출국 기구(OPEC) 회원 산유국 중 페르시아만 연안 6개국이 원유 공시 가격을 배럴당 3.01 달러에서 5.12 달러로 70% 인상한다고 발표했다. 다음날 10월 17일에는 아랍 석유 수출국 기구(OAPEC)가 원유 생산의 단계적 삭감(석유 전략)을 결정했다. 또한 아랍 석유 수출국 기구(OAPEC) 국가는 10월 20일 이후 이스라엘이 점령지에서 철수할 때까지 이스라엘 지지국에 대한 경제 제재(석유 금수)를 잇따라 결정했다. 또한 12월 23일에는 석유 수출국 기구(OPEC)에 가입한 페르시아만 연안의 산유국 6개국이 1974년 1월부터 원유 가격을 5.12 달러에서 11.65 달러로 인상하기로 결정했다.

    미국은 가장 우호적이라고 믿었던 사우디의 초 강수에 큰 충격을 받았다. 1차 석유파동은 국제질서를 재편했다. 미국이 쇠퇴하고 중동국가의 오일 패권이 형성되었다. 석유파동을 겪은 후 미국 정부도 그동안 아랍에 대해 거만하게 굴던 태도를 바꾸었다.

    파이잘 국왕의 죽음, 그리고 현재...

    1975년 정신이상이 있던 조카 파이살 빈 무사이드의 저격으로 사망했다.

    오일쇼크를 일으켜 미국에 큰 타격을 주면서 사우디아라비아의 위상을 올린 왕이자 보수적이고 폐쇄적이기로 유명한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찾아보기 드문 개혁 성향 군주였기 때문에 암살 당시 석유 무기화 및 이스라엘 견제에 분노한 미국과 유대인들이 배후에 있다는 음모론이 있다.

    이 사건 후, 자의던 타의던 미국과 우호적으로 지내게 되지만, 2019년 예멘 반군의 아람코 정유시설 공습에 시설의 50%가 파괴되면서, 더 이상 미국이 사우디의 방패가 되지 못한다고 판단했는지 중국의 시진핑의 방문에 바이든과는 대조적으로 극진히 대접하는 모습을 보였다.[각주:5]

    현재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의 주도로 아람코 지분 매각등을 통해 '탈석유' 경제개혁을 진행하고 있다.